광개토왕비에 석회 덮었다…일본 조사기록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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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바다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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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뒤흔든 고구려 정복군주 광개토대왕(374~412). 그의 실체를 지난 근대기 세상에 다시 알린 건 일본 학자들이었다. 높이 6m가 넘는 대왕의 비석을 그들은 처음으로 샅샅이 훑으며 살핀 뒤 사진을 찍고 글자를 판독했다. 하지만 공식 조사기록은 전혀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다. 왜 그랬을까?
1913년 10월 조선총독부 지원을 받은 일본 역사학자들은 사상 최초로 만주벌에 흩어진 고구려 유적의 실체를 학술조사했다. 압록강 기슭 집안에 있는 고구려 도읍 국내성터와 환도산성을 비롯한 인근의 산성, 장군총을 비롯한 숱한 무덤떼, 성 근교에 있는 5세기 광개토왕의 거대 비석을 열흘 넘게 둘러보고 200장 넘는 사진을 찍고 현장 상황을 기록했다.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재학자였던 도쿄대 건축과 교수 세키노 다다시가 단장을 맡고 문헌사에 밝은 조사원 이마니시 류, 현장 유적과 사진에 능통한 야쓰이 세이이쓰 등이 수행원으로 참여한 조사단은 1000㎞ 이상 되는 방대한 거리를 주파했다. 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 조선의 중부와 북부를 가로질러 압록강 넘어 집안까지 갔다가 다시 경성(서울)으로 돌아오는, 한달 이상 걸린 대규모 조사였다.
하지만 학자들은 당연히 내야 할 후속 보고서를 발간하지 않았다. 100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조사단을 이끌었던 세키노 다다시와 조사원 이마니시 류가 1~2년 뒤 학술잡지에 간단하게 조사를 요약한 글을 쓴 게 전부다. 하지만 그들이 당시 찍은 유적 사진은 지금까지 인용된다. 광개토왕비와 주변 풍경, 피라미드를 방불케하는 장군총 등의 사진은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에 실리면서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이 고구려 유적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유적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고구려 유산의 실체를 후대 처음 드러낸 계기이면서도 조사 경위나 내용이 안개에 싸여 있던 1913년 집안 유적 조사의 주요 내용을 담은 당시 사진과 도면 등의 현장 조사 자료들이 세상에 처음 나왔다.
공개한 이는 20세기 초 일제가 처음 기틀을 놓은 한반도 유적 조사의 실상을 추적해온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다. 그는 수년 전 일본에서 입수한 식민사학자 야쓰이 세이이쓰(1880~1959)의 학술 사료 파일(이하 야쓰이 비망록)을 뒤져 1913년 일본 조사단이 총독부 지원을 받은 1차 조선 고적 조사 당시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과 만주 집안 유적을 찍은 유리건판 사진 280장과 관련 도면 70여점을 발굴하고 지난달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일부를 공개했다.
공개된 사료들은 일본인 학자들이 광개토왕비를 처음 학술조사한 기록 원본이 나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술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사료는 광개토왕비의 비석 표면에 석회칠을 하고 글자를 임의로 새겨넣었다는 당시 중국인 탁본업자와 조사원 야쓰이가 면담한 기록이다.
현지에 살던 탁본업자 초붕도를 만나 헌병보조원의 통역으로 대화해보니 풍화로 비석 표면이 닳자 1900년대부터 석회를 계속 바르고 기존에 모본으로 생각한 문장의 글자를 임의로 새겨 넣었다는 내용이다.
광개토왕비 비석을 19세기말 이미 일본군 등이 개입해 석회로 덮고 내용을 변조했다는 의혹을 1970년대 역사학자 이진희가 제기한 바 있으나 이 면담 사료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1980년대초 중국 학자 왕젠췬이 탁본한 업자의 후손을 만나 비석을 보존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석회로 덮고 글자를 다시 넣었다는 진술 내용을 논고로 소개한 적은 있으나 당사자를 인터뷰한 면담 기록이 처음 나온 것이어서 학계에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군이 직접 변조했다는 결정적 물증은 아니다. 세키노나 이마니시가 몇 년 뒤 자신의 개인적 논고에서 일부 전언 형식으로 탁본업자의 진술을 인용한 기록도 있지만, 1900년대 초반부터 석회를 계속 바르면서 비석 표면을 보강하고, 누가 제공한 문자텍스트를 기준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 새로 글자를 써넣었다는 당사자의 직접 증언이 기록된 사료가 확보됐다는 점에서 이진희의 비문 변조설의 재검토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의미가 있다고 정 교수는 분석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현재 광개토왕비의 비문에서 한일 학계사이에 첨예한 논란이 일고있는 신묘년조에 해당하는 내용이 일체 없다는 점이다. 신묘년조는 광개토왕의 재위기인 391년 신묘년에 왜의 세력이 바다를 건너와 신라와 백제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구절, 이른바 ‘래도해파’(來渡海破) 구절인데, 당시 고대 일본의 대륙 진출 역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총독부와 일제 식민사학계의 입장으로 보면, 이 구절을 전혀 사진으로 찍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정 교수는 “당시 석회칠을 한 비석의 상태가 자신들이 해석한 래도해파 구절을 보여줄 수 없는 컨디션이었을 가능성이 커서 찍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정 교수가 공개한 사진들은, 만주 고구려 유적과 한반도 북부의 유적들이 23개 항목으로 묶여 있다. 광개토왕비는 항목 7로 묶여 18장이나 되는 사진들을 찍은 것으로 나타난다. 원경을 찍고 우측면 근경, 탁본광경, 정면과 우측면, 각면의 상하 구분 사진들까지 찍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신묘년조’는 아예 빠져있다.
이외에도
에 실린 집안 유적의 당시 현장 도면이 두어점에 불과한 데 비해 야쓰이가 소장했던 원래 조사자료에는 70점 이상 들어 있어 당시 조사단의 실사 현황을 구체적으로 복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평가다.
공개된 1913년 조선 고적 조사 1차 사료는 다음주에 경북도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명의로 펴낸
이란 자료집에 정 교수의 해제와 함께 실려 배포될 예정이다. 정 교수는 고대사학계와 함께 광개토왕비 관련 조사자료에 대한 공동연구 작업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부담스러운데 자게에서 2번 연속 일본이라서 -0-;;;
그래도 할말은 해야겠습니다.
과거사라든지 지금 현재 경제협.력이라든지 필요합니다...
과거사는 과거사대로 진행해야하고 경제 협.력은 경제대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정치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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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토님의 댓글
- 마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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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닥치고 쪽바리!
북한,중국 운운하는 새끼치고 쪽바리 왜종자 아닌놈을 못봄
샤아아즈나블님의 댓글
- 샤아아즈나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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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크참여중님의 댓글
- 보잉크참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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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일본에게서 흑자를 만든적이 없는데.
경제혁력하면 우리가 더 적자거래를 하게되는건데. ;;;;
앤도버님의 댓글
- 앤도버
- 작성일
쪽본을 위해서
Dark1972님의 댓글
- Dark1972
- 작성일
오히려 이제 자립해 가던 반도체 핵심소재의 국내 생산업체들이 죽어가고 있죠.
일본에 끌려가지 않고 동등한 입장에서 거래를 하려면 과거사 청산등 잘못된 부분은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함.
일본은 굽히고 들어가면 힘이 없어 그렇는 줄 알고 더 큰 것을 요구하는 습성이 있어요.
오히려 미국처럼 힘으로 눌러야 훨씬 원활한 거래가 가능한 족속임.
모찌e님의 댓글
- 모찌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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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지금님의 댓글
- 현재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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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wntodaudcp님의 댓글
- Dnwntodaud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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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7님의 댓글
- RE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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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크오님의 댓글
- 클리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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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해당국가의 문화나 국민들의 정신등 여러가지면으로 중요한 요소임.
역사 따윈 조또 신경쓸게 아님. 이런식으로 취급하는건 짱개새끼들밖에 없지.
왜냐면 짱개새끼들은 모택동과 함께 지들 역사를 다 박살내버렸으니까 ㅋㅋ
byaty님의 댓글
- byaty
- 작성일
일본 쓰레기들은 조작해서 지들 유리한 내용을 넣었을거라는 소리가 나오고
중국 쓰레기들은 아예 지네 역사라고 우기는 병신짓을 하고
에휴
하모모하님의 댓글
- 하모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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륭푱님의 댓글
- 륭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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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DOTINFINITYL…님의 댓글
- NOTDOTINFINITY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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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ckscar님의 댓글
- Bocksc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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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조건허니잼님의 댓글
- 인간의조건허니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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